대학이 사라지면 혁신도 사라진다, 보스턴의 경고 [기획] 판교는 왜 실리콘밸리가 되지 못했나 -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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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보스턴 외곽 Route 128 고속도로를 따라 늘어선 IT 기업들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실리콘밸리의 진짜 경쟁자는 여기다." DEC(Digital Equipment Corporation), Wang Laboratories, Data General. 이 기업들은 당시 미국 기술 산업의 상징이었다. MIT와 하버드라는 세계 최고의 연구대학이 바로 옆에 있었고, 우수한 인재는 끊임없이 공급됐다. 표면적으로 Route 128은 실리콘밸리와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Route 128은 조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너진 것은 기업이 아니라 문화였다
1994년, UC버클리 교수 AnnaLee Saxenian은 훗날 고전이 된 책 한 권을 펴냈다. 제목은 『Regional Advantage』. 이 책에서 그는 실리콘밸리와 Route 128이 왜 다른 길을 걸었는지를 분석했다. 결론은 기술의 차이가 아니었다. 문화의 차이였다. Route 128의 기업들은 수직적이고 폐쇄적이었다. DEC 같은 대기업이 부품 설계부터 조립, 소프트웨어까지 모두 내부에서 처리했다. 직원들은 이직을 꺼렸고, 기술은 기밀로 분류됐으며, 외부와의 협업은 드물었다. 대학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MIT 연구실에서 나온 기술은 대기업 계약으로 흡수됐고, 스핀오프 스타트업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반면 실리콘밸리는 달랐다. 직원들이 자유롭게 이직하고 창업했다. 경쟁사 엔지니어들이 퇴근 후 같은 바에서 술을 마시며 아이디어를 나눴다. 실패한 창업자가 다른 스타트업으로 흡수됐다가 다시 창업했다. 정보는 흘렀고, 네트워크는 촘촘해졌다. 대학이라는 앵커는 두 지역 모두에 있었다. 하지만 그 앵커를 활용하는 방식이 달랐다.
PC 혁명이 왔을 때, Route 128은 준비가 없었다
1980년대 중반 PC 혁명이 시작됐을 때, Route 128의 대기업들은 자신들의 미니컴퓨터 비즈니스를 지키는 데 급급했다. DEC의 창업자 켄 올슨은 1977년 이런 말을 남겼다. "어떤 사람이 집에 컴퓨터를 두고 싶어할 이유가 없다." 기술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순간, 폐쇄적 구조 속에 갇혀 있던 Route 128은 방향을 틀지 못했다. DEC는 결국 1998년 컴팩에 인수됐다. Wang Laboratories는 1992년 파산 신청을 했다. Route 128의 전성기는 채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끝났다. 같은 시기 실리콘밸리는 PC, 인터넷, 닷컴 붐을 연달아 흡수하며 오히려 더 커졌다. 개방적 생태계는 패러다임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기업을 만들어냈다.
보스턴은 어떻게 다시 살아났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보스턴은 그냥 실패한 클러스터의 사례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보스턴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부활했다. 현재 MIT 캠퍼스 바로 옆 켄달스퀘어는 세계 최대 바이오텍 클러스터다. 1평방마일 안에 150개 이상의 바이오테크 기업이 밀집해 있다. 모더나, 바이오젠, 노바티스 연구소가 모두 이곳에 있다. IT 클러스터로서의 Route 128은 무너졌지만, 보스턴은 바이오텍 허브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답은 MIT와 하버드 의대라는 앵커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쓰러지고 산업이 바뀌어도, 대학은 계속해서 새로운 연구를 했고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냈다. IT에서 바이오로 패러다임이 이동하자, MIT와 하버드는 그 새로운 패러다임의 연구 기반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클러스터는 재구성됐고, 새로운 생태계가 싹텄다. 앵커 대학이 없었다면 이 재도약은 불가능했다.
판교에 Route 128의 경고를 대입하면
지금 판교의 모습은 1980년대 Route 128과 닮은 구석이 있다. 대형 IT 기업들이 집적해 있고, 숫자는 인상적이며,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AI가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지금, 판교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판교 입주 기업들 중 AI를 단순히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AI 원천기술을 '연구'하는 곳이 얼마나 되는가. 다음 패러다임이 바이오AI든, 로봇이든, 양자컴퓨팅이든 그 기술이 판교에서 나올 수 있는 구조가 있는가. Route 128은 앵커 대학이 있었음에도 폐쇄적 문화 때문에 무너졌다. 그리고 그 앵커 덕분에 다시 살아났다. 판교는 지금 앵커를 막 심기 시작하는 단계다. KAIST AI 연구원이 착공됐고, 카네기멜런대와의 협약이 진행 중이다. 보스턴의 교훈은 하나다. 기업은 패러다임이 바뀌면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은 남는다. 그리고 그 대학이 다음 판을 만든다.
다음 화에서는 시선을 판교로 다시 돌린다. KAIST가 착공됐고 카네기멜런대 협약이 맺어졌다는 건 분명 좋은 신호다. 그런데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가. 건물이 지어지는 것과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 글은 '판교는 왜 실리콘밸리가 되지 못했나' 시리즈 3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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