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KAIST가 착공됐다, 근데 충분한가? [기획] 판교는 왜 실리콘밸리가 되지 못했나 - 4편

김승용 대표기자
2026.03.276
KAIST가 착공됐다, 근데 충분한가? [기획] 판교는 왜 실리콘밸리가 되지 못했나 - 4편
KAIST가 착공됐다, 근데 충분한가? [기획] 판교는 왜 실리콘밸리가 되지 못했나 - 4편 관련 자료
판교에 드디어 대학이 들어온다. 그런데 건물이 지어지는 것과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2026년 2월 26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 포클레인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KAIST 김재철AI대학원 판교 연구동 착공식이었다. 총 542억 원이 투입되는 이 프로젝트는 동원그룹 창업자 김재철 명예회장의 사재 출연과 KAIST, 성남시의 협력으로 만들어졌다. 2028년 2월 준공이 목표다. 판교에 처음으로 KAIST라는 이름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신상진 성남시장은 착공식 자리에서 말했다. "3년간 추진해온 구상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판교 테크노밸리와 연계한 AI 인재 육성의 거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분명히 의미 있는 첫걸음이다. 그런데 이 착공 소식을 들으며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착공과 생태계 사이의 거리

건물이 지어진다고 생태계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역사는 그 사례로 가득 차 있다. 한국에도 비슷한 선례가 있다. 2000년대 초 전국 곳곳에 테크노파크와 벤처단지가 세워졌다. 건물은 번듯했고 입주 기업도 채워졌다. 하지만 그 안에서 스탠퍼드 산업단지 같은 유기적 혁신이 일어난 곳은 거의 없었다. 건물은 지었지만 그 안에서 작동해야 할 연결고리, 즉 대학 연구실과 기업, 기술과 자본, 창업자와 투자자를 잇는 구조를 설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KAIST AI 연구원이 판교에 들어서는 것은 과거의 테크노파크와 다르다. KAIST라는 브랜드, AI라는 시대적 맥락, 판교 기업들과의 지리적 근접성. 조건은 훨씬 좋다. 그러나 조건이 좋다고 결과가 자동으로 따라오지는 않는다. 스탠퍼드 산업단지가 실리콘밸리의 씨앗이 될 수 있었던 건 건물 때문이 아니었다. 터만이라는 사람이 교수와 기업, 학생과 창업 사이의 연결을 집요하게 설계했기 때문이었다.

규모의 문제도 있다

솔직한 숫자를 들여다보자. KAIST AI 연구원은 석·박사 과정을 운영하는 대학원 연구시설이다. 수십에서 수백 명 규모의 연구자가 이곳에서 공부하고 연구하게 될 것이다. 의미 있는 숫자다. 그런데 판교 테크노밸리에는 지금 8만~9만 명이 일하고 있다. 1,700여 개 기업이 매일 돌아가고 있다. 스탠퍼드가 매년 수천 명의 이공계 졸업생을 실리콘밸리에 쏟아내며 생태계 전체의 인재 수요를 충당하는 것과, 수백 명 규모의 대학원 연구시설은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다. KAIST AI 연구원 하나로 판교 전체의 인재 생산 구조가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이것은 시작이어야지, 완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카네기멜런대 협약, 그 이후가 중요하다

한 가지 더 주목할 움직임이 있다. 2024년 4월, 성남시는 미국 카네기멜런대학교 엔터테인먼트 기술센터(ETC)와 협약을 체결했다. ETC는 카네기멜런대 컴퓨터과학대학과 미술대학이 합작해 만든 2년 과정의 석사 프로그램이다. AI, 게임, AR 분야에 특화되어 있고, 미국 CS 분야 1위 대학의 이름을 달고 있다. 판교에는 넥슨, 크래프톤, NCSoft가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게임·AI 기업들이다. 카네기멜런대 ETC와의 시너지는 이론적으로 매우 강력하다. 그런데 협약 체결 이후 아직 캠퍼스 설립이 확정됐다는 소식은 없다. 협약은 의지의 표명이지, 완성이 아니다. 실제 캠퍼스가 열리고 학생들이 판교 기업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하기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있다.

제3판교에서 일어난 일

2025년 3월, 경기주택도시공사(GH)는 제3판교 테크노밸리에 앵커 대학을 유치하겠다며 공모를 시작했다. 사전 설명회에 성균관대, 아주대, 을지대가 참석했다. 관심은 있었다. 그런데 실제 공모 신청 기한이 됐을 때, 지원한 대학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이유는 명쾌했다. 연면적 2~3만㎡ 부지에 붙는 1,000억 원대 용지비를 대학이 감당할 수 없었다. 대학 측 논리는 간단하다. 우리는 부동산 개발업자가 아니라 교육기관이다. 1,000억 원짜리 땅을 사서 캠퍼스를 짓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니다. 이 실패는 단순한 행정적 착오가 아니다. 판교에 대학을 유치하겠다는 의지는 있었지만, 대학이 실제로 들어올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KAIST AI 연구원이 가능했던 이유는 하나다. 성남시가 시유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대학에 땅값 부담을 지우지 않았다. 제3판교 공모 설계는 그 반대였다.

건물보다 먼저 설계돼야 하는 것

KAIST AI 연구원은 2028년 완공된다. 카네기멜런대 ETC 협약은 진행 중이다. 좋은 신호들이다. 그런데 지금 당장 설계해야 할 것은 건물이 아니다. KAIST 연구원 학생들이 판교 기업의 실제 문제를 연구 과제로 풀 수 있는 연결 구조가 있는가. 그 연구에서 나온 기술이 스타트업으로 이어질 때 투자받을 수 있는 판교 내 초기 자금 생태계가 있는가. 카네기멜런대 ETC 졸업생이 판교에서 창업했을 때 네트워크와 멘토를 찾을 수 있는가. 건물은 2028년에 완공된다. 하지만 이 연결 구조는 2028년에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지금부터 만들어야 한다. 보스턴이 Route 128의 실패에서 바이오텍 허브로 재도약할 수 있었던 건 MIT가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MIT가 기업, 병원, 투자자와 연결되는 구조가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판교는 지금 그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 시점에 있다. 착공식의 흥분이 가라앉고 난 뒤, 진짜 질문이 시작된다. 건물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할 것인가.

마지막 화에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판교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본다.

이 글은 '판교는 왜 실리콘밸리가 되지 못했나' 시리즈 4편입니다.

김승용 대표기자

혁신인 편집국

독자들에게 가치 있는 인사이트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제보 및 문의 : innous@kakao.com